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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의 각 문장을 누르면 해당 부분에 얽힌 더 자세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편의를 위해 아래에 누름단추를 만들었다. 깜빡이는 막대 커서에서 알 수 있듯 이야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문장이 추가되고 있다. 번호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참고로 진실만 이야기할 것을 약속했으나 작성자의 변심으로 진실이 아닌 문장도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모두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믿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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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때는 3월 9일 이른 아침 6시 59분, 장소는 부평역 중앙 도로가 고행조산부인과. 딸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의 소원대로 딸이 태어났다 하여 ‘소원’이라 이름 붙였다. 그가 꾸린 가정에서는 두 번째 아이였으며 그의 집안에서는 아홉 번째 아이, 첫 번째 딸이었다. 앞서 태어난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돌림자를 붙이지 않았고 한자 없이 한글로 이름 지었다. 아이는 커서 한자 없는 이름이라 근본이 없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름처럼 제 원하는 대로 살면서도 왠지 모르게 주류에 서지 못 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이의 태몽은 커다란 물고기였다고 한다. 그가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 뒤로 지나는 철길을 따라 요란한 열차 소리가, 야단스러운 바퀴 진동이 전해지던. 쏟아지는 햇살 사이로 작은 먼지들이 빙빙 돌며 춤을 추던 그곳에서 아이는 한 뼘씩 자라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그의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는 듯했지만 평탄한 운은 여기까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집은 한껏 넓어졌고 어수선한 시장 대신 윈도 베이커리가, 상점이, 아파트가 늘어섰다. 아이는 이곳에서 난생 처음 엘리베이터를 보았다.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때 엘리베이터가 처음 발명되었다고 착각했던 듯하다. 걸어 다니던 유치원에서 멀어져 그의 차를 타고 다녔고, 길어진 통원 길에서 휘파람 부는 법을 배웠다. 카오디오에서는 언제나 강산에와 안치환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이가 먼저 배우고 싶다고 말해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영어는 공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네다섯 살에 가지고 놀던 수첩에는 알 수 없는 글자를 한 바닥 빼곡히 적어 놓은 흔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영어 필기체라 생각하고 끄적였다.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 했다. 다만 이것이 최초의 실마리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먼저 배우고 싶다고 말해 시작한 것으로 두 번째이자 마지막 타자. 포스터와 표어 그리기, 구성을 제일 좋아했다. 신승훈에 열광하던 여고생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어스름한 저녁 시간까지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덕분에 라디오 듣는 법을 배웠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처음으로 인천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프랑스어와 중국어를 추가로 배웠다. 엉뚱하게도 영화 ‘연애사진’을 보고 카메라에 흥미가 생겨 토이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자습 시간이면 몰래 학교를 빠져 나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대패 삽겹살을 구워 먹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수학에 능해 이과를 선택했지만 가고 싶은 과가 없어 하나씩 지우다 유일하게 남은 길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적당한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하자면 미처 완성하지 못한 미술학도의 꿈을 건축으로 이루겠다는 포부가 있었다고나 할까. 안도 다다오, 루이스 칸, 헤르조그 드 뫼롱, 문훈, 차운기, 후리모지 테루노부를 좋아한다. 철저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골랐으며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이론은 질색이라 찍고 싶은 것이 보이면 마음껏 셔터를 누르는 것이 다였다. 답사를 다니고 기행을 떠나는 맛을 제대로 보고 말았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언제나 수업은 뒷전이었다. 현상 약품이 강한 탓에 온몸에서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날이 많았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근대건축은 근대 시기에 지은 건물로,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산물이다. 단, 근대건축물로 규정하는 시대의 기점은 연구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상 공간으로 사용하는 데다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어 그저 낡은 건물이라 여기기 쉬운 탓에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가치를 느끼지 못 하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근대건축연구실에서는 서울 시내에 산재한 그런 낡은 건물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으나 완성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이미 사라지고 없는 건물이 많았고 조사 당시에도 허물어지는 건물이 많았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철거되고 있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건물을 설계하는 대신 오랜 흔적에 애착을 가지게 된 배경을 놓고 진작부터 고민한 바, 어느 책에서 가까스로 해답을 찾았다. 건축가의 건축 철학을 형성하는 데 어릴 적 환경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 그의 경우 거창하게 철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나 어렵지 않게 근대건축을 찾을 수 있던 고향의 풍경에서 필시 영향을 받았다 말해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인천항 부근은 그가 좋아하는 분위기가 짙은 편.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돌려 보면서 그가 살아 본 적 없는 시절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느끼곤 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그저 막연한 생각이었다.

#0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1
인천에서 태어났다. 때는 3월 9일 이른 아침 6시 59분, 장소는 부평역 중앙 도로가 고행조산부인과. 딸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의 소원대로 딸이 태어났다 하여 ‘소원’이라 이름 붙였다. 그가 꾸린 가정에서는 두 번째 아이였으며 그의 집안에서는 아홉 번째 아이, 첫 번째 딸이었다. 앞서 태어난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돌림자를 붙이지 않았고 한자 없이 한글로 이름 지었다. 아이는 커서 한자 없는 이름이라 근본이 없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름처럼 제 원하는 대로 살면서도 왠지 모르게 주류에 서지 못 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이의 태몽은 커다란 물고기였다고 한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2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그의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는 듯했지만 평탄한 운은 여기까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집은 한껏 넓어졌고 어수선한 시장 대신 윈도 베이커리가, 상점이, 아파트가 늘어섰다. 아이는 이곳에서 난생 처음 엘리베이터를 보았다.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때 엘리베이터가 처음 발명되었다고 착각했던 듯하다. 걸어 다니던 유치원에서 멀어져 그의 차를 타고 다녔고, 길어진 통원 길에서 휘파람 부는 법을 배웠다. 카오디오에서는 언제나 강산에안치환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3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웬일인지 아이가 배우고 싶단다. 그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영어는 공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수첩에는 알 수 없는 글자를 한 바닥 빼곡히 적어 놓은 흔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영어 필기체라 생각하고 끄적였다.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 했다. 다만 이것이 최초의 실마리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4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제 발로 찾아가 시작한 것으로 두 번째이자 마지막 타자. 포스터와 표어 그리기, 구성을 제일 좋아했다. 신승훈에 열광하던 여고생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어스름한 저녁 시간까지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덕분에 라디오 듣는 법을 배웠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5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처음으로 인천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프랑스어와 중국어를 추가로 배웠다. 엉뚱하게도 영화 연애사진을 보고 카메라에 흥미가 생겨 토이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자습 시간이면 몰래 학교를 빠져 나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대패 삽겹살을 구워 먹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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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수학에 능해 이과를 선택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원시적인 방법을 선택. 꽃잎을 하나씩 떨구듯 하나 하나 지워 나가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골랐다. (언제나 그랬듯) 뒤늦게 적당한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하자면, 미처 완성하지 못한 미술학도의 꿈을 건축으로 이루겠다는 포부였달까. 안도 다다오, 루이스 칸, 헤르조그 드 뫼롱, 문훈, 차운기, 후리모지 테루노부를 좋아한다. 철저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골랐으며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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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이론은 질색이라 찍고 싶은 것이 보이면 마음껏 셔터를 누르는 것이 다였다. 답사를 다니고 기행을 떠나는 맛을 제대로 보고 말았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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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언제나 수업은 뒷전이었다. 현상 약품이 강한 탓에 온몸에서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날이 많았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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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근대건축은 근대 시기에 지은 건물로,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산물이다. 단, 근대건축물로 규정하는 시대의 기점은 연구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상 공간으로 사용하는 데다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어 그저 낡은 건물이라 여기기 쉬운 탓에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가치를 느끼지 못 하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근대건축연구실에서는 서울 시내에 산재한 그런 낡은 건물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으나 완성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이미 사라지고 없는 건물이 많았고 조사 당시에도 허물어지는 건물이 많았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철거되고 있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건물을 설계하는 대신 오랜 흔적에 애착을 가지게 된 배경을 놓고 진작부터 고민한 바, 어느 책에서 가까스로 해답을 찾았다. 건축가의 건축 철학을 형성하는 데 어릴 적 환경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 그의 경우 거창하게 철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나 어렵지 않게 근대건축을 찾을 수 있던 고향의 풍경에서 필시 영향을 받았다 말해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특히 인천항 부근은 그가 좋아하는 분위기가 짙은 곳이다.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돌려 보면서 그가 살아 본 적 없는 시절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느끼곤 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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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그저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외국어를 배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알파벳은 마치 이 나라에 고하는 작별 인사와도 같았다. 분명 이곳이 아닌 어딘가, 이곳이 아닌 어디에서든 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살도록 설계된 인생이라고 믿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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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가방에는 포트폴리오가 들어 있었다. 바다 너머에서는 낯선 이가 낯선 이를 맞이했다. 그들은 이방인을 궁금해했고 그럴 때면 작업물을 꺼내 보여주었다. 한번 연락해 보라며 누군가의 메일 주소를 적어 주는 이도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 쪽지는 두 번 다시 꺼내 본 적이 없다. 여행을 가기 몇 해 전 그는 영화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에서 카우치서핑 문화를 처음 접했다. 여행자에게 거실 소파를 내어주면 숙박비 대신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상당히 낭만적인 이야기. 영화 속 이야기는 현실이 되었고 그가 여행을 간 시점에는 홈페이지를 통해 세계 곳곳의 여행자와 호스트가 연결되고 있었다. 이방인도 카우치서퍼가 되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비록 전 세계 수십 억 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지만 그로써는 유일했으며, 그 역시 수십 억 개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주워 담았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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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가져갔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우중충한 회색 빛과 공허히 흩어지는 사이렌 소리가 좋았으며, 그와 같은 이방인이 많다 정도. 그리고 전혜린이 처절하게 느낀 외로움까지. 그마저도 좋았다고 한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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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다시 써내려간 이 나라에 전하는 마지막 인사. 우습지만, 독일어로.

     “행운을 빌어.”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14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그에게는 빛나는 졸업장 대신 K가 찍어준 사진 한 장이 유일했다. 사진 속 그는 학사모를 어색하게 쓴 채 스타치스 다발을 들고 있다. K는 쓸쓸해 보인다며 야단이었지만, K가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없었을 테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15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얄팍한 돈을 받고도 열심히 했고 재미도 있었다. 소리 없는 글자와의 놀이, 언어와의 춤이 밤 늦게까지 이어지곤 했다. 사무실, 지하철, 버스,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때로 걸으면서도 머리와 손이 쉬질 않았다. 나중에는 번역까지 맡아 형편이 한결 나아졌다. 라면에 달걀 정도는 추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제법 운이 좋았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16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여행작가가 쓴 글을 통해 세상을 누볐다. 소설가 김영하가 『여행의 기술』에서 언급한 ‘탈(脫) 여행’ ‘비 (非)여행’이란 이런 것이었으니. 타인을 통해 경험하고, 장소를 바라보는 타인의 통찰력과 글을 재구성하는 일에 몰두하기. 몰두하기를 끝내면 언제나 진한 노을을 배경으로 하루의 끝을 알리는 막이 내려오고 있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17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그 외 몇몇 자리를 더 거쳤음을 밝힌다. 한철 왔다가는 철새와도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전전한 곳이 많아 ‘그곳’들에 관해 작성할 수가 없고 전할 만한 이야기도 없다. 그 사이 그에게서 낯선 냄새를 맡은 지난 이방인들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이따금 그들의 장소에 가면 그 시덥잖은 감각이 되살아났으나 어쩐지 더는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형체 없는 유령이 될 수 없었기에.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18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철새의 마지막 정착지. 빌딩 숲에서 떨어져 한갓진 그곳에서는 작은 새가 지저귀고 멀리서 시작된 뻐꾸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추운 계절이면 기러기 떼가 하늘을 날았다. 그도 그 틈에 끼어 그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떠났다. 난입한 이방인 때문에 열을 맞춘 대열이 흐트러졌지만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듯했다. 여전히 노을은 짙었다. 이번에는 물들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하며 악착같이 날개짓을 했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19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생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생존이라 하기엔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과 망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지만서도. 가령 모두가 잠을 자는 새벽 시간 경비실에 앉아 남몰래 편집을 한다든지, 어둠이 깔리면 트럭을 끌고 등장하는 심야 책방 같은 것들. 악착같이 날개짓 한 끝에 세운 계획치고 허무맹랑해 보이는가. 그렇다고 문제가 될까. 햇살엔 세금이 안 붙어 참 다행이라는 노랫말처럼 상상엔 세금이 붙지 않는 걸. (슬프지만) 그만의 방식이리라. 안타까움이 크다면 왼쪽 ‘연락하기’를 눌러 그에게 따끔한 조언을 전해주기를.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20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문득 떠오른 책이 하나 있다. 언젠가 그가 꼭 내야겠다고 다짐했던 책이. 굳게 다짐한 것치고는 한동안 새카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가 하도 안타까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던 기억의 신이 강림한 것인지 어느 날 문득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현지 출판사에 문의하니 판권이 살아 있단다. 좋아, 바로 착수. 2022년 가을 출간을 목표로 현재 작업을 진행 중이다. 과연 책이 무사히 세상에 나올 수 있을지. 걱정, 불안, 부담으로도 부족해 공포에 휩싸인 그의 앞날이 기대된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기록을 끝내면 흩어진 지난 이방인들처럼 그 또한 자취를 감출 거라는 것이다. 그가 그랬듯 세상과 동떨어져 형체 없이 떠다니는 또 다른 유령이 그의 숨소리를 들을 때까지 말이다.








#0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1
인천에서 태어났다. 때는 3월 9일은 1년 중 68번째, 윤년일 경우 69번째 날이다. 이 날 태어난 이들은 2월 19일에서 3월 20일생 별자리에 해당하는 물고기자리다. 진부하지만 재미로 본 물고기자리인의 특성에서 가장 공감한 부분을 옮기자면 ‘몽상가에 낭만을 즐기며, 싫어도 싫다는 말을 하지 못 하는 소극적인 성격에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 한다’이다. (차마 적고 싶지 않지만) 덧붙이자면 ‘21세기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전적’이라고. 그래서인지 이름처럼 제 원하는 대로 살면서도 왠지 모르게 주류에 서지 못 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이의 태몽은 커다란 물고기였다고 한다. 그가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아이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 뒤로 지나는 철길을 따라 소란한 열차 소리가, 요란한 바퀴 진동이 전해지던. 쏟아지는 햇살 속 작은 먼지들이 빙빙 춤을 추던 그곳에서 아이는 한 뼘씩 자랐다. 지구가 태양을 여섯 번 감싸 안는 동안.1

1 넬이 부른 노래의 제목 「지구가 태양을 네 번」에서 차용했음을 밝힌다. 지구의 공전주기를 빗댄 표현으로,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 년이다.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2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그의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는 듯했지만 평탄한 운은 여기까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집은 한껏 넓어졌고 어수선한 시장 대신 윈도 베이커리가, 상점이, 아파트가 늘어섰다. 아이는 이곳에서 난생 처음 엘리베이터를 보았다.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때 엘리베이터가 처음 발명되었다고 착각했던 듯하다. 걸어 다니던 유치원에서 멀어져 그의 차를 타고 다녔고, 길어진 통원 길에서 휘파람 부는 법을 배웠다. 그들을 태운 르망은 어디든 달렸고, 아이는 바람을 탄 민들레 홀씨가 되었다. 카오디오에서는 언제나 강산에와 안치환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우리가 들었던,
    우리가 불렀던,

    우리가 좋아했던,
    우리가 반복했던,
    우리가 즐겨찾던,
    우리가 흥얼거린,

    우리가 함께,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3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웬일인지 아이가 배우고 싶단다. 그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영어는 공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수첩에는 알 수 없는 글자를 한 바닥 빼곡히 적어 놓은 흔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영어 필기체라 생각하고 끄적였다.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 했다. 다만 이것이 최초의 실마리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4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제 발로 찾아가 시작한 것으로 두 번째이자 마지막 타자. 포스터와 표어 그리기, 구성을 제일 좋아했다. 신승훈에 열광하던 여고생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어스름한 저녁 시간까지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덕분에 라디오 듣는 법을 배웠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5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처음으로 인천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프랑스어와 중국어를 추가로 배웠다. 엉뚱하게도 영화 연애사진을 보고 카메라에 흥미가 생겨 토이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자습 시간이면 몰래 학교를 빠져 나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대패 삽겹살을 구워 먹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6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수학에 능해 이과를 선택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원시적인 방법을 선택. 꽃잎을 하나씩 떨구듯 하나 하나 지워 나가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골랐다. (언제나 그랬듯) 뒤늦게 적당한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하자면, 미처 완성하지 못한 미술학도의 꿈을 건축으로 이루겠다는 포부였달까. 안도 다다오, 루이스 칸, 헤르조그 드 뫼롱, 문훈, 차운기, 후리모지 테루노부를 좋아한다. 철저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골랐으며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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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이론은 질색이라 찍고 싶은 것이 보이면 마음껏 셔터를 누르는 것이 다였다. 답사를 다니고 기행을 떠나는 맛을 제대로 보고 말았다. 호모 비아토르. 여행하는 인간. 이동의 본능.2 겨울이면 지방 도시를 누볐다. 지역을 넘어갈 때를 제외하곤 전부 걸어서. 근대건축이라 알려진 것들의 위치에 점을 찍어서.

2 김영하가 쓴 「여행의 이유」에서 언급한 내용임을 밝힌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여행하는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라 정의했고 인류는 이동하는 본능으로 생존하는 데 유리하게 진화했다.


인천에서 태어났다.

인천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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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언제나 수업은 뒷전이었다. 현상 약품이 강한 탓에 온몸에서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날이 많았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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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근대건축은 근대 시기에 지은 건물로,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산물이다. 단, 근대건축물로 규정하는 시대의 기점은 연구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상 공간으로 사용하는 데다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어 그저 낡은 건물이라 여기기 쉬운 탓에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가치를 느끼지 못 하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근대건축연구실에서는 서울 시내에 산재한 그런 낡은 건물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으나 완성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이미 사라지고 없는 건물이 많았고 조사 당시에도 허물어지는 건물이 많았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철거되고 있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건물을 설계하는 대신 오랜 흔적에 애착을 가지게 된 배경을 놓고 진작부터 고민한 바, 어느 책에서 가까스로 해답을 찾았다. 건축가의 건축 철학을 형성하는 데 어릴 적 환경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 그의 경우 거창하게 철학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나 어렵지 않게 근대건축을 찾을 수 있던 고향의 풍경에서 필시 영향을 받았다 말해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특히 인천항 부근은 그가 좋아하는 분위기가 짙은 곳이다.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돌려 보면서 그가 살아 본 적 없는 시절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느끼곤 했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시덥잖은 감각이 있었다. 예를 들면 어지러이 쌓인 지난 이방인들의, 시간의 지층 같은 것들. 제법 오래 머뭄직한 공기 중에는 그곳에 살았던, 살다 간, 살아 온 이들의 숨이 뒤섞여 있음을 살끝으로 느꼈다. 때로 저 깊이 어딘가에 갇혀버린 지난 이방인들의 와글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과연 그를 본 사람이 있을까. 흩어진 이방인을 좇는 형체 없는 유령을.

인천에서 태어났다. 줄 맞추는 법 아시는 분 알려 주세요...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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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그저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외국어를 배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알파벳은 마치 이 나라에 고하는 작별 인사와도 같았다. 분명 이곳이 아닌 어딘가, 이곳이 아닌 어디에서든 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살도록 설계된 인생이라고 믿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11
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가방에는 포트폴리오가 들어 있었다. 바다 너머에서는 낯선 이가 낯선 이를 맞이했다. 그들은 이방인을 궁금해했고 그럴 때면 작업물을 꺼내 보여주었다. 한번 연락해 보라며 누군가의 메일 주소를 적어 주는 이도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 쪽지는 두 번 다시 꺼내 본 적이 없다. 여행을 가기 몇 해 전 그는 영화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에서 카우치서핑 문화를 처음 접했다. 여행자에게 거실 소파를 내어주면 숙박비 대신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상당히 낭만적인 이야기. 영화 속 이야기는 현실이 되었고 그가 여행을 간 시점에는 홈페이지를 통해 세계 곳곳의 여행자와 호스트가 연결되고 있었다. 이방인도 카우치서퍼가 되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비록 전 세계 수십 억 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지만 그로써는 유일했으며, 그 역시 수십 억 개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주워 담았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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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오래 머문 도시는 프라하다. 관광지부터 관광지가 아닌 곳까지 쏘다닌 덕분에 그곳에서의 생활에 금세 익숙해졌다. 밤 거리를 걸었고 새벽 공기를 마셨다. 출근길에 합류도 해보고 트립어드바이저에 올라오지 않은 가게를 즐겨 찾았다. 푸드코트에서 중국 음식과 싸구려 튀김을, 아시안슈퍼에서 컵라면과 압생트를, 마트에 빼곡히 진열된 맥주와 초콜릿 종류별로 사 먹고 사 마셨다. 기차와 버스에 올라 근교를 다녀오고 국경을 넘었다 돌아오기도 했다.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았고 길에서 마주친 우체부와 인사를 나누고 타투이스트에게 타투 가격을 물어보고 다녔다. 서점에서 체코어 문제집을, 디자인문구점에서 연필을, 한인마트에서 해태 포도 봉봉를 고르며 시간을 보냈다. 올드스퀘어에서 제일 맛있는 브랏부어스트 노점과 요금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깨끗한 화장실과 추위를 피해 잠시 앉아 몸 녹일 곳과 환율을 잘 쳐주는 환전소를 알아냈고, 장난감 기차로 서빙하는 맥줏집과 노을에 붉게 타오르는 프라하 성을 지켜볼 수 있는 비밀장소를 발견했고, 테스코에서 제일 맛있는 과자와 베이글만 맛이 없는 베이글 가게까지도 찾아냈다. 크네들리키 혹은 덤플링, 포테이토 덤플링, 브레드 덤플링 혹은 브람보코프라 부르는 빵을 좋아했다. (스비치코바를 주문하면 맛볼 수 있다) 나무 문이 달린 수동 엘리베이터를 보았고 13구역에 있는 아돌프 로스의 초창기 작품을 보았고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댄싱 하우스를 보았다. 프라하 1구역 무스텍의 근사한 재즈 바를, 프라하 3구역에서 제일 비싼 칵테일 바를, 프라하 7구역의 사람 하나 없는 동물원을(한겨울이었다), 희귀 모델만 파는 프라하 2구역의 나이키 운동화 가게를 다녀왔다. 또, 또 뭐가 있었더라. 이따금 한국어가 그리워 이름 모를 이들을 만나곤 했는데 영국에서 한인민박 스태프로 일하다 온 여행객, 호주에서 줄곧 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간호사, 지금의 내 나이쯤 되어 한국에서 퇴사를 하고 네덜란드에 공부하러 간다는 여자 한 명 그리고 남자 한 명, 집에서 어학연수를 보내주어 실컷 서양 물을 맛보고 있다는 어린 대학생도 있었다.

지금 생각나는 숙소만 대략 열 곳이 넘는다. (모두 조식을 챙겨 주는 곳이다) 그때 그의 짐이라곤 고작 18인치 트렁크와 어깨에 매달고 다니던 여분의 워커가 다였다. 그마저도 성가셔서 어쩔 줄 몰랐고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다. 줄 맞추는 법 아시는 분...줄 맞추는 법 아시는 분...줄 맞추는 법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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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그에게는 빛나는 졸업장 대신 K를 처음 만난 건 베를린에서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이 되는 해였기에 크리스마스 마켓과 기념 행사가 겹쳐 베를린 시내는 한껏 들뜬 인파로 가득했다. 조용히 숙소에 있기 아까운 밤이었다. 그날 밤 어둠속에서는 축축한 겨울 냄새가 났다. 그 속을 정신없이 걷다 당도한 곳이 어디였더라. 정확히 브란덴부르크 문 앞이었던가. 사람들 틈에서 반짝이는 너를 본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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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얄팍한 돈을 받고도 열심히 했고 재미도 있었다. 소리 없는 글자와의 놀이, 언어와의 춤이 밤 늦게까지 이어지곤 했다. 사무실, 지하철, 버스,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때로 걸으면서도 머리와 손이 쉬질 않았다. 나중에는 번역까지 맡아 형편이 한결 나아졌다. 라면에 달걀 정도는 추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제법 운이 좋았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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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여행작가가 쓴 글을 통해 세상을 누볐다. 소설가 김영하가 『여행의 기술』에서 언급한 ‘탈(脫) 여행’ ‘비 (非)여행’이란 이런 것이었으니. 타인을 통해 경험하고, 장소를 바라보는 타인의 통찰력과 글을 재구성하는 일에 몰두하기. 몰두하기를 끝내면 언제나 진한 노을을 배경으로 하루의 끝을 알리는 막이 내려오고 있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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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그 외 몇몇 자리를 더 거쳤음을 밝힌다. 한철 왔다가는 철새와도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전전한 곳이 많아 ‘그곳’들에 관해 작성할 수가 없고 전할 만한 이야기도 없다. 그 사이 그에게서 낯선 냄새를 맡은 지난 이방인들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이따금 그들의 장소에 가면 그 시덥잖은 감각이 되살아났으나 어쩐지 더는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형체 없는 유령이 될 수 없었기에.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독립 편집자가 되었다. 1인 출판사 체크포인트 찰리를 만들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에 있는 장소 이름이다.

여전히 인천에 살고 있고 29년 된 아파트에서 독립 편집자로 일하며 출판사 이름으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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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겨울 옆 동네로 이사했다. 일곱 살 영어를 배웠다. 아홉 살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외국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흑백필름 건축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암실에서 하루종일 현상과 인화를 반복했다. 근대건축연구실에 드나들었다. 건축 복원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꿈꾸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파리가 아닌 베를린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을 땄다. 건축잡지사에 취직했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편집팀으로 이직했다. 건축잡지사에 복귀했다. 안그라픽스 출판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철새의 마지막 정착지. 빌딩 숲에서 떨어져 한갓진 그곳에서는 작은 새가 지저귀고 멀리서 시작된 뻐꾸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추운 계절이면 기러기 떼가 하늘을 날았다. 그도 그 틈에 끼어 그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떠났다. 난입한 이방인 때문에 열을 맞춘 대열이 흐트러졌지만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듯했다. 실제로 기러기 대열이 흐트러지면 기러기 무리가 받는 공기 저항이 거세진다. 다시 말해 비행하는 데 힘이 든다는 뜻이므로 이방인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 혹은 착각이다. 한 마리라도 대열에서 벗어나면 금방 제자리를 찾아 대열을 만들어야 한다. 이들은 비행 중에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는데,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힘을 주는 소리다. 지상에서 들어보면 그들의 울음소리는 악을 쓰는 것에 가깝다. 이제야 그들이 얼마나 악착같이 날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